사랑,

나는 내 눈물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또 사랑합니다.
내가 많이 아팠던 지난날, 

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그들의 손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또 사랑합니다.
독한 괴로움속에 빠져 들었을 때
등뒤에서 감싸주던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 사랑합니다.
나의 손을 잡아주고 나를 감싸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사랑합니다.

기억,

어느날 바람불던 새벽녘에
그들의 노래를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마 그것은 내가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첫번째 노래였습니다.

모든것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막막함에
그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그날 새벽 달빛은 참 아름다웠으며
가끔씩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나와 그들의 슬픔을 닦아 주었던
고마운 바람도 기억합니다.
 
부질없고 통속적인 삶의 흐름속에서
나는 그 모든것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내 안의 응고된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의 날이 찾아와도
나는 그 모든걸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과 나와의 약속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


1826년 7월 4일 피츠버그에서 포스터는 아일랜드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아닌가, 독립 50주년의 축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부유한 상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포스터의 출생은 어쩌면 드라마틱한 일생을 예시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적하고 밋밋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그들의 집을 사람들은 화이트 코티지(white cottage)라고 불렀다.

The White CottageThe White Cottage

푸른 언덕에 흰 벽으로 된 저택이 인상적인 탓일까, 어릴 때 죽은 첫째와 넷째를 제외하고도 7남매를 둔 이 집안은 그야말로 다복한 일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그의 출생을 전후해서부터 이 집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미국을 엄습했던 경제 공항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포스터가 도산을 하게 되고, 아담한 화이트 코티지도 빚의 담보로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1832년 겨우 6세의 소년 스티븐은 그로부터 때로는 온 집안이, 때로는 엄마와 형제들만, 때로는 혼자만이 친척집에 맡겨지는 등, 여기 저기를 옮겨가면서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스티븐이 처음으로 피아노라는 악기를 두들겨보게 된 것도 엄마와 누나를 따라 대학 총장이던 백부의 집에 기숙하던 때의 일이다. 그러나 개척시대의 태평스럽던 환경은 스티븐의 명랑한 성격을 구겨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A Foster Family GatheringA Foster Family Gathering


그는 어딜 가나 곧 싸움대장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음악을 할 때는 지휘자, 연극을 할 때면 주인공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환경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이런 소년이 학업에 충실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머리가 커갈수록 자기가 놓인 처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인간이 싫어지고 학교가 싫어지게 되는 스티븐 소년은 그 허전함이 더욱 음악에의 경사를 가속화 한다.

Stephen Foster's PianoStephen Foster's Piano


스티븐의 음악 수업은 거의 독학이었다. 피치버그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는 독일계 이민 헨리 클레버라는 사람에게 약간의 음악 지도를 받았다고 하나, 피츠버그에 한 가족이 사는 집을 갖고 있지 않았던 스티븐이 지도를 받았으면 얼마나 받았으랴. 그러나 뜻 밖의 사건이 아직 기초적 훈련이 부족한 젊은 아마추어 작곡가의 운명를 좌우하게 된다. <뉴 밀러>라는 뉴욕의 주간 신문에 투고한 그의 가곡이 실린 것이다. <뉴 밀러>의 주필도 한 바 있는 조지 모리스의 작사로 된 <사랑하는 이여, 창을 열어다오>라는 노래였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스티븐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은 물론 18세의 젊은이가 운명의 창문이 열린 것으로 기뻐했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마침내 학업을 포기한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아마추어 합창단을 조직해서 작곡 발표의 무대를 만들었다. 해바라기의 화가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와의 형제애처럼 스티븐에게도 모리슨이라는 형이 있어서 음양으로 그를 도왔다. <오 수재너> <루이지애나의 미인> < 네드 아저씨> 등의 가작이 쏟아져 나왔고, 그 노래는 오하이오 강을 타고 미국 전역으로 퍼저 가면서 출판사들도 그의 악보를 출판하시 시작했다. 음반도 방송망도 없었던 시대, 유럽에서 모여든 이민들의 신생국, 악보로 음악이 대중화할 만큼 수준이 높을 리도 없다. 체코의 드보르작이 뉴욕에 처음 설립된 음악학원의 교장이 되기 위새 대서양을 건너기 5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활기에 찬 신흥 도시를 누비며 민요적인 노래를 전파하는 주력 부대로 <니그로 민스트럴스>라는 보컬 그룹들이 있었다. "이디오피언 그룹"이라고 불린 이들은 각지를 유랑하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멤버는 모두 백인 이었다. 다만 무대에 등장할 때만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눈자위에 흰 동그라미 입술은 두텁게 붉은 연지로 그려 넣어 니그로가 되어, 밀짚모자와 줄무늬바지라는 기묘한 스타일로 익살을 부리며 노래를 불렀다.

오락에 주린 개척시대에 민주들에게 이들의 등장은 폭풍적인 인기였다. "니그로 민스트럴스"는 비온 뒤의 죽순처럼 전국 각처에 생겼다. 어느덧 스티븐이 노래의 제공자로 이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가사까지 자작인 스티븐 포스터의 노래에는 뚜렷하게 두 종류로 갈라놓을 수 있는 질이 다른 노래를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정통 영어로 작사된 노래들 - 이를테면 <올드 블랙 조> < 금발의 제니> <마이 올드 켄터기 홈>등,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흑인들의 발음을 구사해서 "니그로 민스트럴스" 악단에 맞춘 노래들인데 예를 들어 <스와니 강> <오 수재너> <시골 경마>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노래들 중에 지금 흐르는 <스와니 강>에서 그 본보기를 찾아보자.

이 곡은 포스터가 25세 때 작곡했는데 학대 받던 흑인이 자기 고향과 젊은 날을 회상하고 또 어머니를 사모하는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이 곡은 처음에 유명한 성악가가 크리스티가 400달러를 포스터에게 주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가 후에 포스터의 작품이라고 밝혀졌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이 곡이 스와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포스터의 동생인 모리슨(그림1)이 쓴 전기에 의하면. [1851년 어느날 자기 사무실에 찾아 온 포스터가 2개의 음이 연결된 강 이름이 남쪽 강에 없겠느냐고 물어 Yazoo와 Pedec를 들었으나 모조리 거절, 나중에는 지도(그림3) 펼쳐놓고 더듬어 갔다. 나의 손가락은 멕시코만(플로리다주)에 흐르는 작은 냇물 Swanee(그림2) 멈췄다."이것이다 ... 정말 이것이다" 라고 형은 부르짖었다. 그후 Way down upon Swanee River로 시작되는 노래가 작곡되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Morrison Foster Morrison Foster (그림1) Suwannee RiverSuwannee River (그림2)

An Outline MapAn Outline Map(그림3)



The Old Folks at Home

The Original Version of Old Folks At Home or Suwanee RiverThe Original Version



Way down upon de Swanee ribber
Far, far away Dere's
wha my heart is turning ebber
Dere's wha de old folks stay
All de world de am sad and dreary
Ev'ry where I raom
Oh ! dark eyes how heart grows weary
Far from de old folks at home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마음만 헛되이 오늘도 달리지만
언제나 나의 옛고향을 찾아나 갈까
꿈에도 잊지 못할 마음의 고향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그 고향

이 가사에서 우리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은 The가 de로 되어 있고, river가 ribber로 되어 있는 것. 흑인들의 발음으로는 With가 Wid가 되듯, th가 d로 발음되는 관사 The도 de로 되어 있다. 그리고 ever가 ebber로 되듯, v도 bb로 변화된 발음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의 번역 가사도 사투리를 써서 토속적인 맛을 내야만 옳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여담에 속하는 일이리라.

24세가 된 스티븐은 결혼 생활로 들어간다. 신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래 <금발의 제니>의 주인공으로 정식  이름은 제인 맥도웰이라고 한다.

Jane Denny McDowell Foster,Jane Denny McDowell Foster

스티븐이 죽는 날까지 제니를 사랑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둘의 꿈같은 결혼과 불행했던 이야기는 다음에 <금발의 제니> 포스팅 시간에 만나겠지만 여기서 몇가지 그들의 마지막 불행했던 나날을 돌이켜 보자면 그것은 슬픔의 연속이다. 꿈같은 결혼 이듬해에 마리안이라는 귀여운 딸까지 얻은 이들 부부는 해가 갈수록 떨어졌다 만났다 하는 야릇한 부부 생활을 되풀이 한다. 그 불행을 많은 포스터 연구가들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던 생활과 차츰 심해가던 그의 알코올 중독에 돌리고 있다. 저작권법이 확립되지 않고 있던 그 당시에 대충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쓴 음악가의 불행은 슈베르트의 비극을 보더라도 능히 잠작 할 수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 있는 노래는 오히려 악보를 살 필요가 없고 간악한 출판업자들은 그 맹점을 노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슈베르트처럼 스티븐도 경제 관념에는 매우 어수룩한 선량한 인간이었음이니라. 여하튼 1860년 가을, 스티븐은 처자를 데리고 뉴욕이라는 마의 도시로 간다. 그러나 이 때도 제니는 마리안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 이듬에 터진 남북전쟁은 더욱 그를 궁지로 몰아 넣는다. 마침내 그는 에누리없는 룸펜이 되어 빈민가의 목로주점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손을 떠는 산송장이 되어 버린다. 그 산송장 같은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파크허스트 듀어 여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가 38세로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뉴욕 바와리 가 15번지 이름만이 근사한<아메리칸 호텔>이라는 낡은 여인숙. 지금은 이 부근 일대가 차이나 타운이 되어 중국인에게 점거되어 있고, 스티븐이 마지막 숨을 거둔 <아메리칸 호텔> 자리는 잡초가 우거진 임시 주차장이 되어 있다.

스티븐 포스터의 비참한 최후를 생각할 때, 곧 연상되는 것은 그보다 몇십년 먼저 살다간 독일의 슈베르트다. 그러나 슈베르트에게는 끝까지 다정했던 마음의 벗들이 있어서 애정에 굶주리지는않았다. 스티븐은 그야말로 뉴욕의 뒷골목에서 거지처럼 죽어갔다. 그 비참함에 있어서 스티븐은 오히려 <보리밭, 나뭇잎 배>의 작곡가 윤용하와 닮은 점이 있다. 남겨진 유품으로는 슈베르트는 포스터보다는 볼품이 있다. 그야 물론 비참하기에 있어서 낫고 못하고는 냉혹한 비교가 되지만, 슈베르트는 유품으로 양복 세벌과 내의와 친구 등이 있었으나 스티븐 포스터의 유품으로는 입고 있던 양복 한 벌 이외는 모자와 구두뿐 내의도 양말도 없다 . 윤용하 역시 십칸방에 살면서 구제의연품으로 자신이 입고 있던 유일한 윗옷을 벗어 놓고 간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스티븐의 마지막 유품속에 때묻은 가죽지갑이 하나 있었는데 현금이 38센트. 그리고 구겨진 종이쪽지 한 장이 나왔다. 그 구겨진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 하나가 적혀 있었다

" Dear friends and gentle hearts ...다정한 친구와 따뜻한 마음 "

Stephen Foster's MonumentStephen Foster's Monument




어쩌면 드보르작도 포스터와 비슷한 나날을 겪었다. 어느 정도 작곡가로서의 기반과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예측 못할 불행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의 딸 요제프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사랑하던 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생후 11개월 된 딸 루제나가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인을 마시고 사망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생후 3년 6개월이던 큰 아이 오타카르가 수두로 죽었다. 드보르작의 충격은 무엇으로도 비견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냥 슬프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불행이 연이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비탄에 빠진 드보르작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 것은 음악에의 강한 열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만큼 모든 아픔을 종교와 음악을 통해 위안받으려 했다. 그는 보헤미아의 브람스로 불리었는데 그것은 브람스에 의해 그의 작품이 1등이라는 평가를 받은 때였으며 그 이름은 널리 미국과 영국에 전해져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음악박사칭호를 받았다. 1892년에 그는 초청을 받고서 미국에 건너가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해 1895년까지 재직했다. 이 미국 체재중에 그는 미국의 음악을 연구했고 이것에 의해 많은 명곡이 탄생하게 되며 그중에 포스터의 'Old Folks At Home' 곡도 있었음은 당연하리라.

드보르작과 포스터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포스터가 1864년에 세상을 떠났고 드보르작이 1892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으니 둘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포스터를 생각하며 드보르작이 이곡을 통하여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슬픈 포스터를 위로하고 어떠한 곤경에 처해 있어도 행복스런 미래의 희망을 잃지 않는 건전한 이념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Antonín Dvorak
Stephen Collins Foster- Old folks at home
Collegiate Chorale, New York Harmonie Ensemble with Arthur Woodley
Conducted by Steven Richman


포스터
슈베르트
윤용하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그들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서로가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불멸의 삶을 살고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각의 아픔과 괴뇌를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낸 그들의 음악에는 물처럼 흐르는 고운 영혼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윤용하의 나뭇잎배처럼 쓸쓸하게 물위를 떠다니는 듯하지만
슈베르트가 아주 평온한 구원처럼 불러주는 시냇물의 자장가가있고
그 모든 것을 동경하는 포스터의 스와니강이 그것입니다.

그들이 견디기 힘들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나와는 닿을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 갔지만
그들이 다시 만나 새로운 강으로 흐를때
그들 마음 마음에 작은 먼지 만큼의 '
슬픔도 없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내 안의 것들을 더욱 사랑하며
그들이 전해준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잊지 않으며
예전에  나를 감싸주었던 그 따스함으로
언제까지라도 내가 그들을 안을 것입니다.


윤용하 Foster Schubert



        명곡과 명인들(박용구)
        세계의 명곡 (세광음악)
        America's Famous Folksong Writer 
        Pictorial Biography of Stephen Collins Foster     



2008.08.05 20:52 T 1 C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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