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은 '이승'의 반대어이다. 죽어서 영혼이 가 머무르는 곳을 황천(黃泉)이라고 한다. '黃' 은 흙을, '泉'은 물을 뜻한다. 저승을 황천으로 비유한 것은 모태 회귀 현상일 개연성이 있다. 생물이 흙에서 나오듯이, 사람도 흙에서 나왔다는 생각일 것이다. 이는 '지모사상'과도 연결된다. 저승은 저생(生)의 '생(生)이 '승'으로 변하였다. 이승은 이생(生)이다. 저승을 어원에서 보면, 죽어서도 삶(生)이 있다고 전해온다.

무속 신화의 바리공주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그러나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저승길을 물어, 새의 깃도 가라앉는 약수를 건너 무장승을 만났다. 무장승은 '그대는 열두 지옥과 바람도 새도 쉬어 넘는 철성을 지나. 깃조차 가라앉는 약수 3000리를 어떻게 건너 이 곳까지 왔는고?" 하고 물었다. 바리공주는 '소녀는 오구대왕의 일곱째 공주로서, 병든 부모님을 위해 서역국의 약수를 구하러 왔습니다. 부디 길을 열어 주십시요. " 하고 간청했다. 무장승은 바리공주에게 길값으로 나무하고 불때고 물을 긷는 등 석 3년이 지난 후, 부부의 인연을 맺어 아들 일곱을 낳아 달라고 했다. 바리공주는 그렇게 한 후, 숨살이, 뼈살이, 살살이의 3종 빛깔의 북숭아꽃과 약수를 구해 가지고 무장승과 아들들과 함께 돌아와, 상여에 실려 장지로 가는 부모를 살려 냈다. 이 신화는 이승과 저승의 공존과 함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에 효에 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바리공주가 떠난 저승길은 이승의 끝에서 다시 육로 삼천리, 해로 삼천리 너머에 있다. 죽은 넋은 칼산 지옥, 화탕 지옥. 얼음 지옥, 칼나무 지옥, 혀 빼는 지옥, 독사, 암흑 지옥 등 시왕이 다스리는 10종 지옥 외에 팔만사천 지옥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지옥을 지나 다시 높은 산을 넘고 험한 길 너머 끝없이 넓은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생명수가 있는 저승에 닿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로 보아, 저승은 서쪽으로 거의 무한대의 바깥에 자리잡고 있는 공간이다. 생의 공간인 이승이 동쪽인 데 반하여, 저승은 서쪽 방위로 되오 있는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면서 그것은 이승과 극한적으로 격리된 공포와 저주의 땅이다. 그리하여 저승은 인간 공포와 고통을 상징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감과 관련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같이 저승에는 공포와 죄악감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 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제주 무속 신화 천지왕 본풀이에서는 형제간인 대별왕과 소별왕이 서루 저승의 주관자가 되기를 기피하고 이승의 주관자가 되기 위해 경합을 벌이기도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밤에, 죽은 영혼을 위무하여 저승으로 보내는 귀양풀이 굿을 한다. 무속에서는 정명이 된 사람은 저승차사가 적패지와 오라를 가지고 와서 묶어 잡아 간다고 믿고 있다. 귀양풀이굿은 망인을 구박하지 말고 고이 저승에 데려가 주도록 저승차사에게 비는 굿이다. 여기서 저승은 망인의 처소로 간주된다. 저승은 사자의 넋을 그 자체로 구원하는 기능을 갖추지 못한 죽은 이들의 집단 주거지에 불과 한 듯하다. 그러나 서천 서역국의 종착지가 극한인 점으로 미루어, 저승은 영혼이 누릴 마지막 안식처 또는 평화를 보장하는 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저승의 명암이 드러난다. 또한 저승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죄악과 그에 수반된 공포하는 인간 존재 및 의식의 극한적 어둠을 상징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 윤리적, 인간적 성취와 그에 수반된 위안이나 만족이라는 인간 존재 및 의식의 극한적 밝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지리적 단절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삶의 섭리라는 면에서 볼 때에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인과론적 고리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저승이 이승과 대유적인 연관을 가진 땅, 무관하면서도 상관된 땅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승에서 한 인간이 치러 낸 행적을 원인을 삼은 결과로서 저승살이가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승은 이승의 연장선상에 있게 된다. 그런데 이승과 저승의 연관이 이승쪽에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염라대왕이라고 하는 저승의 통치자는 이승의 삶의 길이를 미리 결정짓는다. 그에 따라. 한 사람을 이승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이기도 한다고 믿고 있다. 저승살이라는 결과를 빚는 원인은 이승살이이지만, 그 이승살이는 근원적으로 저승에 의해 미리 운명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인과론적인 대유법의 관계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이중으로 가로놓여 있어서, 한국인의 인생관에서 이승살이와 저승살이는 서로 순환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죽어서도 제사를 통해 자손과 함께 살면서 자손에게 복을 준다고 믿는다. 즉, 삶과 죽음은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생활 속의 이쪽과 저쪽이다. 죽음은 우리가 이미 아는 이승과 모르는 저승과의 접촉점이며 관문이다. 여기에 종교적 행위로서의 장송 의례가 요청된다. 장송 의례는 이승에서 죽고 저승에 재생하는 종교적 통과 의례이다.

불교에서 저승은 극락과 지옥으로 구별되고 있어서,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극락에 왕생하고자 한다. 이 경우, 불교의 저승은 평화와 공포의 양극을 동시에 상징하는 셈이다. 절에서 명부전과 시왕전등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극락에 가고자 기구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이 관음보살이나 지장보살과 함께 한국인의 중요한 신앙인 까닭도 사후에 그가 거주하는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관념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불교의 저승에서 차갑고 뜨거운 고통의 상징성을 찾아 낸 한편, 봄날의 꽃밭 같은 안식의 상징성을 찾아 내었다.

동양의 인생관에서는 이승과 저승이 서로 순환관계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저승은 단순히 죽음의 땅이 아니라. 삶의 섭리가 비롯하는 삶의 근원지이다. 그러므로 삶의 뿌리인 저승에서 이승으로 나와, 사람은 다시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저승은 인생의 시발점을 상징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인의 저승 관념은 죽은 자가 먼 나라로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죽은 자의 영혼은 가꺼운 산에 머무르면서 조상신으로서 농사지을 때나 제사 때 마을로 내려온다고 생각한다. 또, 장례 의식 중에 짚신을 묘지 입구에서 던지고는 돌아보지 않고 돌아오는 의례가있다. 이는 묘지를 저승의 입구로 간주하여 죽은자를 이승과 분리시키는 행위이다. 이처럼 저승은 산 자와 공존 또는 분리된 세계의 양면성을 띤다.

서양에서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두 관념을 합치면, 대체로 우리의 저승과 비슷한 공간상이 잡히게 된다. 지옥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극한적 고통이 가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있어서 저승의 가장 부정적인 상과 별차이가 없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령, 사막 지대와 이웃한 주민들에게 지옥은 뜨거운 불기운의 땅을, 북방 사람들에게는 니플레힘 같은 얼음 기운 땅을 상징하는 것은 좋은 예들이다. 이에 비해, 천당은 구원의 곳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승이 죄와 벌, 윤리와 성취감이라는 상보적 관념의 궁극적 원형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형에서 저승의 상징을 찾는다면, 저승이라는 관념은 인류에게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죽음은 그대로 생의 연장이어서, 내세라는 세계에 저승이 있다고 믿는다. 즉, 사람이 죽은 뒤 그 혼령이 가서 산다는 '황천' '유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저승을 소재로 하여 절에서 그린 '지옥도'와 '극락도'가 감로 탱화중에 표현되고 있다. 그 그림 속에는, 현세에서 악업을 지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보'를 받는데, 팔대지옥, 팔한 지옥등 136종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로 지극히 안락한 세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참조 : 한국 문화 상징 사전


 



산 자와 죽은 자, 그 영원한 이별의 소리 - 만가

사람의 일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일과 놀이와 죽음으로 짜여 있을진대, 거기에 애환이 없을 수 없다. 오래전 진도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노래로 만들어 슬플때나 기쁠 때 늘 함께했었다. 이 음반에 소개 된 '남들 들노래(중요무형문화재 51호)는 모내고 김맬 때 부르는 농요이며, '강강술래'는 마을 아낙들이 원무를 하며 부르는 유희요, '만가'는 상여소리이다. 모두 군말이 필요치 않은 삶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제 모습을 지닌 것이 드물다.
 
천길을 떠나 먼길을 가는 영혼을 달래는 만가소리는 지금은 잘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과거엔 상여가 지나가는 행렬을 마주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었다. 만장을 휘날리며 상여 행렬이 지나갈 때는 굳이 보이지 않아도 멀러서부터 알아차리게 하는 특징적인 '소리'가 있었다. 딸랑딸랑 요령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상여소리, 즉 만가는 목청좋은 어른이 앞에서 서서 요령을 흔들며 '이제 가면 언제 오나'하고 선소리를 메기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이야 어이야'하는 뒷소리를 함으로써 살아남은 망자와 영원히 이별하는 사람들의 애통함을 표현하곤 했다.


이 음반에는 삶의 짙은 정서가 배어나는 육자배기 조의 들노래와 상여소리, 진도 아리랑의 흥겨움을 지닌 강강술래가 남들 들노래 창 기능보유자 조공례((1925-1997)와 진도 아낙들 육성으로 일체의 반주 없이 불려진다. 소리꾼의 구성지고 청아한 소노리티가 생생하게 재현되며 코러스와 앙상블도 깨끗하고 명료하다. 흙냄샌지 갯내음인지 아니면 살붙이의 체온인지는 모르겠으나, 푸근하고 넉넉하고 한없는 여유가 기막히다.


더욱이 기막힌 일은 이 음반을 지구 반대편 스위스 음반회사 갈로(GALLO)가 기획 제작했다는 사실이며 그 해 권위있는 ACC 음반대상수상 및 많은 상을 받았다는 것은 주목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스위스 음반 회사 갈로는 클래식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이름난 레이블이다. 40년 전통을 지닌 갈로는 수백종의 풍부한 레퍼토리에 다양하고 다채로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우리에겐 '킴 워커'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등 많은 음악가와 연주단이 알려져 있다.

낯선 이국의 나라에서 자국민들도 잘 듣지 않고 꺼리는 장송곡을 굳이 음반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쌀은 먹거리지만, 소리는 영혼이다.




 


 


2011.07.03 00:39 T 0 C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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